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방 3왕가 (문단 편집) === 옷치긴 왕가 === [[예수게이]]와 [[호엘룬]]의 소생으로, 막내인 테무게 옷치긴은 몽골이 기원한 [[만주]]의 [[흥안령]] 산맥 일대를 분봉받았다. 만주 일대는 목축 뿐 아니라 농경과 수렵도 가능한 풍부한 생산력을 갖춘 지역이었기에, 옷치긴 왕가는 다른 왕가보다 눈에 띄게 발전했다. 옷치긴 이후의 역대 군주들은 요동으로 세력을 확대해 [[1316년]]에는 옷치긴의 후손 토크토아가 '''요왕'''(遼王)의 1자 왕호를 얻었으며, 만주 일대를 장악해 14세기 동아시아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. 대도의 [[원나라]] 조정도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세력을 키워 중앙정부에 대해 스스로 [[대칸]]이 되려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며, 원나라 멸망 후에도 옷치긴 왕가의 요왕 아자스리가 명 태조 홍무제 [[주원장]]과 타협 끝에 만주를 지배했다. 명나라의 영향하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몽골계 [[우량카이족#s-2.4|올량합 3위]]가 바로 그들이었다. 한국사와도 관계가 깊은데, 조선 태조 [[이성계]]의 조상인 [[이안사]]가 항복한 산지(散吉) 대왕(大王)은 옷치긴 왕가의 군주인 보르지긴 타가차르와 가까운 제후왕이었다. 이안사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옷치긴 왕가로부터 천호장 겸 [[다루가치]]를 임명받아 세습하며 함주와 길주 등의 고려인과 [[여진]]인을 지배했다. 윤은숙 교수(강원대)가 저술한 《몽골제국 만주 지배사》(소나무, 2010)에 따르면 [[고려]]의 제26대 [[충선왕]]이 [[심왕]]에 임명된 것에는 이 옷치긴 왕가의 존재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. 13∼14세기 원제국의 동북 만주 지역을 장악했던 옷치긴 왕가는 방대한 경제 인프라를 기반으로 제왕들 중 최고의 경제·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, 대도의 대칸들은 고려의 개경과 요동의 심양에 각각 [[개성 왕씨]]의 부마('''쿠르겐''')왕을 분봉왕으로 세워, 옷치긴 왕가의 과도한 비대화를 견제했다. 여기서 우선 옷치긴 왕가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면, 옷치긴(Otchigin) 즉 테무게 옷치긴(1168∼1246)은 태조 칭기즈 칸의 막내 동생인데 매우 용맹스러운 사람으로 칭기즈 칸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, 현재의 아무르 강 일대에서 한반도 북부까지 다스린 제왕이었다. 칭기즈 칸은 자신의 막내 동생인 옷치긴에 대한 신뢰가 매우 커서 서방 원정(1219∼1225)을 떠날 때 신생 제국의 국정 운영을 맡길 정도로 신임이 깊었으며, 그 덕분에 옷치긴 왕가는 13세기에서 14세기까지 유목과 농경을 모두 할 수 있는 땅을 받음으로써 제왕들 가운데서 가장 큰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. 옷치긴 사후 제2대 왕은 타가차르(塔察兒)였다. 타가차르는 세조 [[쿠빌라이 칸]]의 최대 정적이었던 [[아리크부카]](阿里孛哥)를 격파하여 쿠빌라이가 제5대 카안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, 쿠빌라이 칸(원 세조)의 명령에 따라 항상 원정에 나서는 등 원나라 조정내에서도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다. >“항상 쿠릴타이(일종의 화백 제도)에 참석하여 중대한 국사(國事)를 논의했으며 매우 존경을 받았다.(《집사》)” 그래서 타가차르는 원 세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. 당시 타가차르는 독자적으로 원나라 조정의 법도를 어겨가면서 자신의 관할권이 있는 지역에 사신도 파견하고, 민호도 소집하기도 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. 바로 이점에서 옷치긴 울루스는 원 세조(쿠빌라이 칸)에게 가장 강력한 우방인 동시에 가장 두려운 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. 윤은숙 교수는 심왕 제도도 옷치긴 왕국의 남하(南下)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. 즉 옷치긴 왕가가 원나라 ― 고려 사이에 위치하면서 고려까지 지배하려 했기 때문에 이것을 중간에서 차단하기 위해서 심왕을 설치하고, 양자를 서로 충돌시켜 옷치긴 왕국의 영향력을 통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. 실제로 원 세조가 우려했던 일이 훗날 터지는데 1287년 옷치긴 왕가의 제4대 왕인 나얀(乃顔 : 타가차르의 손자)은 원 세조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대항하여 동방의 다른 제왕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. 원 세조는 고령(73세)에도 불구하고 직접 정벌에 나서 1287년 나얀을 처형했다. 나얀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려 제25대 [[충렬왕]]은 원 세조에게 즉각 지원군을 파견하여 동북 지역의 안전을 일부 담당하려고 했다. 그런데 나얀의 잔당들이 상대적으로 허약한 고려로 몰려오면서 사태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('''[[카다안의 침입]]'''). 충렬왕은 다시 원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1291년에야 반란이 진압되어 고려는 안정을 되찾았다. 이러한 상황을 보면 왜 고려 왕실이 원나라 중앙정부에 의해 요동의 심왕에 임명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. 이러한 점은 당시 고려 왕실의 심왕 임명 또한 당대의 원나라 황실과 동방 3왕가간의 파워게임의 연장선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뜻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